60 - 70년대 뮤지션들과 음악들을 포스팅 하면서 앗-차 싶었다.
이 들을 빼 놓을 뻔 했다.
남진 VS 나훈아
남진과 나훈아는 70년대 쌍벽을 이룬 한국 대중가요계의 아이콘이였다.
당시 국내 가요계의 사실상 "오빠 부대"를 창시한 아이돌 스타의 원조이기도 했다.
남진과 나훈아가 라이벌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들의 상반된 스타일도 한 몫 했다.
일단은 생김새부터 너무나도 달랐다
남진은 그 때 당시, 지금으로 말하자면 일명 "꽃미남" 스타일의 가수였고,
나훈아는 요즘 말로 "상남자" 스타일의 가수였다.
그리고 이 들의 라이벌 구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또 이 들의 고향.
남진은 전라도 사나이.
나훈아는 경상도 사나이.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에 지역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60-70년대라면 오죽했을까. 특히 전라도, 경상도라면 말 다하지 않았나 싶다.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는 70년대 초부터 이어졌었다.
1975년 기사에선 'N군 과 '또 다른 N군' 이었다.
조직적인 팬클럽과 자생적인 팬클럽이라는 기준으로도 두 가수를 둘러싼 구도는 나뉘었다.
1982년 5월 1일 '동아일보'는 이렇게 쓴다.
'이들 둘은 결국 히트곡들을 가지고 대결에 나선다. 남진이 그의 매니저 서판석을 통해 팬클럽을 만들어
전국에 회원 2만여 명을 확보하고 '꽃다발부대', '박수부대', '피켓부대'를 동원하는 등의 조직적인 관리를 했다는 점이나
반대로 나훈아는 그런 조직은 갖지 않았지만 자발적이고 열광적인 팬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었던 것들이
그들의 대결을 항상 부채질 하고 있었다.'
- 동아일보 기사 발췌.
대결의 근거는 현실적이었다. MBC가 해마다 뽑는 '가수왕' 선발에 남진 팬클럽이 조직적으로 움직여
세 번이나 가수왕에 올랐지만, 나훈아는 항상 2등에 머물렀다는 얘기.
남진의 매니저가 술집에 갔다가 나훈아 노래만 나왔다 하면 술집을 박살냈다는 풍문.
작곡가 박춘석씨가 차를 세워두면 양쪽의 팬들이 자동차 보닛 위에 걸터 앉아
서로의 가수에게 더 좋은 곡을 달라고 떼를 썼다는 어떤 장면들.
그리고 아직도 이야기를 꺼내긴 조심스럽지만,
그 유명한 '남진 테러사건'
남진과 나훈아 팬클럽 간의 싸움으로 알려진 '남진 테러사건'에서 남진은 이렇게 말한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는데 주차장에서 누군가가 뒤에서 긴 칼로 찌르며 공격을 했다.
배를 관통한 칼이 15cm 가량 나와 있는 것을 직접 봤다. 그 사건 이후 지금도 몸이 조금 좋지 않다.'
그러나 그는 '나훈아 팬클럽에서 그런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100% 아니다.
당시 나훈아 씨가 맥주병 테러를 당했을 때도 나훈아 씨에게 해를 가했던 친구가 나한테 와서도 행패를 부리고 옥고를 치렀다.
팬클럽 간의 불미스런 사건이 아니었는데 당시의 오해가 지금까지 계속 된 것 같고 나훈아 씨와는 좋은 선후배 관계라고
그 때를 회상하며 그 는 말하고 있다.
솔직히 지금 들어도 정말 소름끼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정말 이 들은 그 당시 치열했다.
또 한가지 에피소드를 말하자면, 1972년
나훈아가 리사이틀 도중 쇼 무대에 유리병을 깨서 들고 난입한 괴한에 의해
얼굴에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사건 이후 남진의 팬들이 저질렀다는 루머가 전국에 퍼져
남진 팬과 나훈아 팬들끼리 패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말 그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가수들이었던 것.
나훈아 얼굴의 굵은 흉터는 그때 남은 상처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나훈아의 모습을 공식 석상에서 볼 수 있었던
2008년 1월 25일 오전 11시, 서울 모 호텔에서 온갖 괴소문에 따른 기자회견을 자청했던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는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말로 그간의 루머를 일측하고는 이날 이후 종적을 감추었다.
개인적으로 이 기자회견 TV에서 생방송으로 보았지만,
아직도 "가황"의 포스는 여전했다.
나훈아를 괴롭혀 온 괴소문들은 '개그맨 폭행설', '개그맨 전 부인과의 관계설'. '야쿠자 관련설'등
미디어 상업주의와 결탁한 국민적 집단관음증은 연예계에서 산전 수전 공중전을 다 겪어낸 나훈아도
어쩔 수 없었다.
잠적 5년째, 그를 봤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 나훈아를 만났다는 사람은 없다.
이제는 '그립다'며 황제의 귀환을 바라는 '팬심'은 여전하다.
나훈아의 품성을 잘 알려주는 과거의 일화가 하나있다.
자주 초정 행사를 뛰는 여느 가수들과는 달리 나훈아는 그의 노래를 앙망하는 고위급 인사들의
파티에 단 한 번도 참석을 수락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다른 가수들은 대게 그런 파티에서 2~3곡을 부르고 3,000만원 가량을 받는 게 관행처럼 돼있는 반면
나훈아의 거절 사례는 굉장히 유명하다.
"나는 대중 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사람 앞에서만 공연을 한다.
내 공연을 보고 싶으면 당장 표를 끊어라."
실제로 삼성 이건희 회장에게 이런 말을 하고 한마디로 딱 잘라서 거절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에도 등장한다.
김용철은 이 일화를 알고 난후
나훈아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손꼽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나훈아는 심수봉을 가수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2010년 여름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심수봉이 직접 밝힌 이야기다.
심수봉이 여학생 시절, 아르바이트 하던 곳에 나훈아가 손님으로 들어왔고,
심수봉은 트로트 황제 앞에서 그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노래가 끝난 후
나훈아가 말 없이 다가가더니 레코드사 사장을 데리고 왔다는 것.
심수봉을 처음 본 대스타가 노래만 듣고 내주었던 음반이 그녀의 데뷔 앨범이 되었다.
자,그럼 여기서 다시 남진과 나훈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또한 두 사람의 20대 군복무 시절 모습도 마냥 이채롭기만 하다.
남진은 70년 청룡부대에 자원입대해 베트남 파병용사로 복무했고,
나훈아는 백마부대 명예정훈대위가 돼 한달간 파월 위문공연을 가기도 했다.
이후 공군으로 복무했다.
명예정훈대위로 베트남에서 위문 공연을 펼치기도 했던
나훈아는 이후 갑작스런 결혼 발표와 함께 가요계 은퇴 선언을 하는 등 문제가 커지면서
73년 극비리에 공군에 자원입대해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조금은 뜬금없지만, 가수 나훈아의 어린시절 사진.
나훈아는 1951년 2월 11일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해 고향 뒷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기타를 즐겨쳤다고 한다.
중학교 때, 가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고,
오아시스 레코드의 사환으로 가요계 생활을 시작해 결국 국민가수가 되었다.
오른쪽 가슴에 나훈아라는 예명 대신 '최홍기'라는 본명이 눈에 띈다.
남진은 인기가 절정이었던 1968년 해병대 청룡부대에 입대했고
이듬해 7월 베트남으로 파병됐다.
위 사진은 베트남 고노이 섬에서 보초 근무 중인 남진의 모습.
가요계에서는 무서울 것 없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지만
베트남에서는 마이크 대신 M-16 소총을 든 사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위 포스터는 남진과 나훈아의 대해 포스팅을 하기위해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찾게 된 진귀한 포스터.
최초의 남진, 나훈아의 대결은 1971년 8월 청계천에 소재했던 국내 최대 살롱무대에서 시작되었다.
살롱 아마존은 의도적으로 두 사람의 라이벌 대결 무대를 기획해 포스터까지 제작했고 언론에 광고까지 냈다.
적중했다.
두 가수의 대결을 보기 위해 아마존 홀은 인산인해를 이뤘지만 남진의 불참으로 대결은 불발탄으로 끝났다.
이 소식이 세간에 화재가 되자 MBC 가요프로 '오색의 화원'에서
두 가수를 함께 초대해 노래 바꿔 부르기로 자웅을 겨루게 했다.
이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두 청춘 가수의 세기의 라이벌 전은 본격화 되었다.
방송이 나간 후 '나훈아가 판정승했다.'는 분위기가 팽배하자 남진은 시민회관 리사이틀무대로
한판 뒤집기 진검 승부를 걸었다.
그러니까 우연하게 주간경향잡지에서 발견한 저 아마존 쌀롱의 광고는
세기의 라이벌 남진 나훈아 대결을 부추긴 최초의 자료다.
비록 불발로 그쳤지만 광고를 보니 두 사람의 노래대결 심사를
입장객 전원의 인기투표로 결정한다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노래대결은 히트곡 대결, 팝송 대결, 신곡 대결, 히트송 바꿔부르기
총 4라운드로 진행 될 예정인데 요즘 유행하는 청중평가단의 심사로 승자를 결정짓는
일종의 서바이벌 오디션 배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시대를 한 참 앞선 기획인 셈이다.
- 위 포스터 블로그 참조
남진은 전성기 당시, 한국의 "앨비스 프레슬리'라 불리며 공연장에서의 화려한 무대매너와 춤사위로 유명했다.
그 의 히트곡을 말하자면 무의미하다. 그냥 다 들어보라고 말하고싶다.
그건 나훈아도 마찬가지.
그래도 대표곡으로 몇 곡 꼽아보자면,
'님과 함께' , '그대여 변치마오', '둥지' 등이 있다.
나훈아의 히트곡 또한 나열한다는 것이 무의미하지만
굳이 뽑자면
'고향역', '울긴 왜울어', '잡초' 등이 있다.
60년대 혜성처럼 등장하여, 70년대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나훈아와 남진.
비록 지금은 육십을 넘긴 중년 가수가 돼 있지만, 그들이 남긴 대중음악의 영향력은 영원하다.
요즘 같은 아이돌 가수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가수계의 대선배로서, 추억의 노래들과 함께
왕성한 활동으로 두 분의 합동 공연을 열어보는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마 만약 그 공연이 열린다면 대한민국 중,후반 세대는 다 들고 일어날 듯 싶다.
by 서울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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