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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정보

한국 재즈 1

(한국 재즈 1)

JAZZ.

어려운 음악이 아니다.

우리 국민의 삶의 애환이 담겨 있다.

그리고

한국 JAZZ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한 평생을 바치신 재즈 뮤지션들이 있다.

오늘 포스팅은 50~60년대 고인이 되신 재즈 1세대 부터.

아직까지도 활발한 활동의 끈을 놓지 않으신 원로 재즈 뮤지션들을 소개 해 드리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우리나라 재즈1세대 뮤지션

이미 우리 곁을 떠나 고인이 된 몇몇 재즈 뮤지션들.

그 중 "박춘석","이봉조","길옥윤" 등 낯익은 이름이 있는가 하면.

"최상용","신지철","엄토미" 등 생소하기 이전에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초창기 재즈뮤지션들...

그들이 재즈와 음악의 열정으로 불태우던 때.

음악으로 사는 삶의 고난함.

인생이 곧 재즈였던 나날들.

이토록 오랜 세월들이 모여 길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짧지않은 한국재즈역사가 되었다.

그들 중 지금은 고인이 된 우리나라 재즈1세대 뮤지션 한국 색소폰계의 대부 故길옥윤 선생님.

한국대중가요계에 재즈를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를 쓴 색소폰 연주자 故이봉조 선생님.

타악기의 명인 故김대환 선생님.

재즈의 전설 드러머 故최세진 선생님.

그들이 써내려간 한국재즈역사.

 

                                                                            한국 섹소폰 계의 대부 "故길옥윤" 선생님

“치과대학이 그 때 조흥은행 뒤 소공동에 있었습니다.

해방되던 해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미도파 근처를 지나가는데 불이 환히 켜진 5층에서 크리스탈 광선 같은 밝은 음악이 들려오는 겁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음악, 이제까지 들어 보지 못한 환상적인 음악이 들려오는 겁니다.

나는 보도에서 그 음악을 듣다가 그 음악에 빨려 미도파 5층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곳은 미 24사단 장교클럽이었습니다.

나는 거기서 생전 처음 보는 미국인 밴드마스터를 잡고 ‘이 음악을 배우고 싶으니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한테 악보를 얻어 연습해서 그 해 10월 1일에 프로가 됐습니다.

그 때 들은 음악이 째즈였습니다.

내 생애를 바꿔버린 순간이었습니다.

그 때 한번 째즈에 매혹 당한 후론 자나깨나 그 음악밖에 없었습니다.” / 길옥윤 인터뷰 중 오효진 글

평양고보를 나와 1943년 경성치과전문대학(서울대학교 치과대 전신)을 다녔으나 그룹 '핫팝'을 결성하여.

주한미군 클럽에서 연주활동 시작으로 그 의 뮤지션의 삶이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재즈연주자로 활동하다.

1966년 귀국하여 패티김과 사랑에 빠졌던 그는 그녀에게 '4월이 가면' 을 선물하며.

결혼에 성공했고 만인의 관심 속에서 스타 음악가 부부로써의 길을 걸었다.

길옥윤은 "이봉조", "이동기" 등과 함께.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커다란 물줄기 역할로 미8군 무대출신의 음악인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재즈로 출발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또 "박춘석", "이봉조", "김희갑" 등과 60년대부터.

국내 가요무대와 음반시장을 이끄는 작곡가로 '사랑하는 마리아' '이별' '사랑의 찬가' 수많은 히트곡을 배출해 음악계의 스타 작곡가로 떠올랐다.

1972년 패티김와 이혼 후 한 동안 활동이 뜸하다가.

1977년 무명이었던 혜은이의 대표곡을 연이어 작곡하며.

작곡가로써의 두 번째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그 후 교수활동을 이어나가지만 사업실패 후.

일본으로 건너가 작은 재즈클럽은 운영하며 작곡가로 재기를 준비하던 1994년.

암 발병사실을 알고 한국으로 돌아와 병원을 전전하다 서울의 어느 병원에서 쓸쓸한 모습으로 1995년 봄날 눈을 감게 된다.

길옥윤 선생님이 작곡 한 대표곡들은 패티김 선생님의 "사랑하는 당신이", "사랑하는 마리아", "사랑의 세레나데"

혜은이 선생님의 "당신만을 사랑해" , "그대와 둘이서", "옛사랑의 돌담길" 등이 있다.

 

 

 

                                         한국 대중가요계의 재즈를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를 쓴 색소폰 연주자 "故이봉조" 선생님

 

1931년 5월1일 경상남도 남해에서 태어난 "이봉조"는 진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는데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의 색소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음악과 관련 없는 건축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재즈와 색소폰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못하고.

테너색소폰 연주자 엄토미(嚴吐美)에게 본격적인 연주법을 사사 받아 아르바이트로 색소폰 연주를 하러 다녔으며.

대학 졸업 후 주 한미8군 각 부대 클럽에서 '이봉조악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본격적인 연주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970년 11월, 일본 동경에서 개최하는 국제가요제에 '안개' 라는 곡으로 참가하여 입상하였고.

이 후 그리스가요제 '너(정훈희 노래)' '나의 별(현미 노래)'로 입상, 남미칠레가요제에 참가하여 '좋아서 만났지요(정훈희 노래)' '무인도(김추자 노래)' '꽃밭에서(정훈희 노래)'로 수상하였다.

색소폰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던 "이봉조" 등이 점차 재즈가수들을 위하여 작곡을 하면서.

스윙이나 스탠다드재즈를 바탕으로 한 가요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며.

정훈희 현미 패티김과 같은 대형가수들을 탄생시킨다.

이봉조의 손에서 태어난 현미의 '밤안개' 최희준의 '맨발의청춘' 정훈희의 '꽃밭에서' 등은.

그 때 당시 대표적인 재즈가요로 뽕짝이 주를 이루던 대중가요계에 새로운 역사를 쓰며 큰 인기를 끌었다.

재즈와 색소폰에대한 열정으로 시작된 음악가의 길을 걸으며.

한국 대중음악계의 큰 업적을 남긴 이봉조는 1987년 8월 31일 심장마비로 쓰러져 지금은 그가 남겨놓은 노래로만 그를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봉조 선생님이 작곡 한 대표곡 들은.

정훈희 선생님의 "꽃밭에서" , "좋아서 만났지요"

현미 선생님의 "떠날때는 말없이" , "밤 안개"

최희준 선생님의 "맨발의 청춘" , "종점" 등이 있다.

 

 

                                                                대중음악계의 대부. 타악기의 명인 "故김대환" 선생님


 

"故김대환"은 열손가락 사이에 여섯개의 북채를 쥐고.

큰북을 두드리는 독특한 연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타악 연주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동시에.

쌀 한 톨에 《반야바라밀다경》 283자를 새기는 세서미각(細書微刻) 작업을 한 한국의 조각가로도 유명하다.

1946년 인천 동산중학교 시절 브라스밴드부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음악과 인연을 맺은 故김대환은 1964년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과 ‘애드 포(Add Four)’라는 그룹을 결성하는 등.

이후 1978년 프리재즈(free jazz) 밴드 ‘강태환트리오’에서 드럼을 연주하였으며.

1980년대에는 가수 "조용필" ,"이남이"와 함께 ‘김트리오’로 활동하며 30여년간 대중음악계에서 활동했다.

80년대 중반 이후 일본 미국 유럽 등지에서 세계적인 뮤지션들과 500여회의 연주회를 펼쳤다.

그는 또 세서미각(細書微刻)과 글자의 대칭을 바꿔 쓰는 좌서(左書)의 달인이기도 했다.

쌀알 한 톨에 반야심경 283자를 새겨 90년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됐으며.

지난해에는 좌서 음각전을 열기도 했다.

2002년부터 2년간 중앙대 타악연희과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지난달에는 한성대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즐겨 타는 것으로 유명했다.

재즈와 타악을 접목한 거장으로 손꼽히며 타악연주의 대가로 음악을 예술의 세계로 승화시킨 故김대환 이후 2004년 3월의 어느날 향년 71세로 별세했다.

故김대환 선생님의 곡은 앨범. "흑우"를 추천 해 드립니다.

"흑우 part1" , "흑우 part2" , "앙코르(한오백년)" 총 3 트랙의 곡으로 이루어진 이 앨범은

인간적인 음악의 한계를 보여주는 북 소리.

그 인간 심연의 울림 "음악은 정확성보다는 감이다."라고 말하는 김대환 선생님의 세포를 발산하는 음악.

그것이 바로 김대환 선생님의 음악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재즈의 전설 드러머 "故최세진" 선생님

한국재즈의 산 역사 故최세진 선생님.

1931년생인 최세진은 가수 김정구에 의해 발굴되어 프로 재즈드러머로 데뷔하게 된다.

박춘석 악단시절 1953년 국내 최초로 'Sing Sing Sing'을 연주하여 세간의 이슈로 떠오른다.

그의 음악활동을 반대했던 부친이 그 공연을 보시고 뮤지션의 길을 허락하셨다고 한다.

그 후 '엄토미악단'에서 드러머로 연주활동을 펼치며 주 한미8군 클럽에서 활약하게 된다.

탄탄대로 음악인생을 걸었던 그가 한국을 떠나.

수 십 년간 일본 , 홍콩 , 대만 , 싱가폴 , 필리핀 등 동남아7개국에서 순회공연을 하고.

홍콩에 영주하며 악단 " the proffessionals " 창단 악단장으로 활동하며 긴 시간동안 해외에서 음악 할동을 이어가게 된다.

귀국 후에도 여전히 국내 재즈 뮤지션들이 설 자리는 많지 않았고 그로 인해 많은 방황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7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무대에 서며 세월을 함께한 재즈1세대 동료들과 농도 짙은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으며.

또 자기의 손녀, 손자 뻘인 학생들 뮤지션들에게 재즈를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2007년 첫 음반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의 생전의 인터뷰에 그가 바라는 한가지 소망이 있다고 했다.

“바라는 거라면, 나는 85세쯤 은퇴할건데 그때까지 매년마다 공연 열심히 하고 은퇴 후에 세계 재즈 명승지 탐방하는 게 목표지.

그럼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이후 재즈인생 60여년을 화려하게 장식한 그는 향년 78세로 눈을 감았다.

 

나의 두번째 포스팅은 50년대 이후 부터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신.

지금은 고인이 되신 1세대 재즈 뮤지션들로 꾸려보았다.

1,2편으로 나눠서 2편은 현재 활동하고 계신 원로 재즈 뮤지션들로 다뤄 볼 생각이다.

재즈 뮤지션들은 그 때 당시. 작곡가나 세션으로 활동을 했기에.

우리가 미처 모르는 분들이 많을 꺼라 생각해서 이번 포스팅을 생각했다.

JAZZ. 정말 어려운 장르도 아니고.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쉽게 다가갈수 있는 장르다.

한국 JAZZ를 위해서라면.

대중들의 관심이 많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직도 어딘가의 클럽에서

한국 JAZZ를 지켜나가기 위해

연주 하고 있을.

JAZZ 뮤지션들을 위해서.

 

by 서울상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