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히피문화라는 새로운 해외문화가 등장 했고,
대표적인 농어촌 현대화 도시개량화사업인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였다.
70년대의 대중음악은 보컬그룹에 뒤를 이어 포크싱어들이 나올 때쯤.
기타 못 치면 간첩이라는 말이 퍼지기도 했었다.
그 음악엔 대화가 있었고, 서정이 있었고, 아마추어리즘에 싱어, 송, 라이터라는 3박자를 갖춘
창작기능까지도 구비한 젋은 그룹들이 등장했다.
김민기, 한대수,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 투 코리언즈..
그때 그 시절, 생활양식도 크게 바뀌었고, 외국에서도 장발, 히피문화가 극성일 때
그야말로 태풍급의 포크 바람이 불어닥쳤는데.
듀오나 솔로 가릴 것 없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때였다.
그리고 우리 포크가수들은 단순히 흉내만이 아닌 창작 가요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다.
포크 듀오 "4월과 5월"(1971. 백순진과 이수만 듀오 시절)
결성 당시 백순진은 중앙대 예대 3학년, 이수만은 서울대 농대에 재학중이였다.
현재 한국 대중음악을 좌지우지하는 SM 엔터테이먼트의 사장 이수만씨도 가요계에 이렇게 데뷔 했었다.
4월과 5월(1972. 백순진과 김태풍)
하지만, 아쉽게도 제1기 4월과 5월의 앨범은 존재치 않는다. (데뷔앨범에 두곡이 실려 있긴 하다.)
몇 개월 간의 짧은 호흡을 맞춘 뒤, 이수만이 탈퇴하고 김태풍으로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4월과 5월이란 듀엣명이 화제가 됐다.
‘트윈폴리오’, ‘트리플’, ‘쉐그린’, ‘뚜아에무아’, ‘라나에로스포’, ‘어니언스’, ‘투에이스’ 등
외국어 이름이 판을 치던 시대에 "4월과 5월"은 유일한 우리말 듀엣, 아니 이중창단이었다.
제2기로 출범한 1972년부터 엄청난 여학생 팬들을 몰고다닌 이들은
젊음의 심장부에 있을 때었으니 그 인기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들개들(1974)
백순진은 이무렵에 4월과 5월로 듀오 활동을 하면서
"들개들"이란 4인조 락그룹을 결성하여 활동을 병행한다.
멤버로는 김찬, 민병진, 이수만과 백순진 이렇게 넷이었다.
72~75년 이라는 3년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있는 음악 활동으로
4월과 5월은 총 4장의 음반을 남기고 해체한다.
번안곡이 굉장히 유행했던 시절에 4월과 5월은 자작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들의 대표곡은 "화"와 "바다의 여인", "내게로 와요"등 주옥같은 명곡이 있다.
히피문화는 곧 청년문화였고, 그 중심에 있었던 한국 모던 포크의 개척자 "한대수"
70년대 초 대중음악의 가장 큰 흐름이라면 가사가 대화 조로 바뀌고, 반말로 바뀌면서
한대수가 미국에서 돌아오고 "창문을 열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라는
가사에서 하나의 큰 물줄기가 터졌다.
얼마 안 있어 김민기, 양희은 등의 새 목소리들이 나타나면서, 노래의 소재는 눈물, 이별, 슬픔에서
완전히 떠나 현실 비판의 노래들, 결국엔 "아침이슬"로 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그것은 아주 큰 변화였다.
눈치를 볼 줄 모르는 그 당시 새 세대, 지금은 대부분 50대에 들어선 장년이 되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때의 그 분들의 공로는 적지 않다는걸 느낀다.
71년도 "아침이슬"로 데뷔한 양희은의 모습.
70년대의 사회적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고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명곡을 딱 2곡 뽑아 보라면
한대수씨의 "행복의 나라"와 김민기씨가 작사 작곡하고 양희은씨가 불렀던 "아침이슬"을 뽑겠다.
그럼 여기서 잠깐 그 2곡의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해볼까 한다.
1968년. 한대수가 처음 음악방송에 출연 했을 당시 한대수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비난일색이였다.
장발도 허용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 산발을 하고 귀걸이에 히피삘 물신풍기는 의상까지.
언론에서는 시시각각마다 한대수를 원숭이라고 비하하며 비난일색이였다.
1967년에 윤복희가 한국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입었을때, 그 때와 거의 흡사한 충격이랄까..
실화로는 한대수가 미국 유학후 장발을 하고 온 모습을 본 한대수의 어머니가 아들이 너무 한심해서
울기까지 하셨다고..
이렇게 시대를 앞서간 그가 무려, 17살. 그러니 현재 나이로 고1때.
작곡했던 곡이 바로 "행복의 나라"다. ("행복의 나라로" 라는 제목으로 알려져있지만, "행복의 나라"가 맞다.)
겨우 고1때 작곡한 이 곡은 민주화 항쟁때 아침이슬과 더불어 가장 많이 불렸고,
지금은 한국포크계의 최고의 명곡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까지 실렸다.
셀 수 없을만큼 리메이크되며, 사랑받았던 이 곡.
정말 시대를 앞서간 천재의 한이 서려있는 듯 하다.
그리고 1970년 김민기가 작사 작곡하고, 양희은의 가수 데뷔곡이기도 한 "아침이슬".
이 곡은 트로트 중심의 식상된 한국 가요 수준을 세계 수준으로 높여 놓았다는 찬사를 받으며
그 당시 대학생이던 김민기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한 곡이다.
1970년 초반에 통기타 선풍을 일으키며 젊은이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이 곡으로 인해 김민기는 1971년 독집 음반을 내고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70년대 명곡 2곡은 리메이크 버전 말고 원곡으로 꼭 들어보셨으면 합니다.)
- 일부 음악평론가 이백천님의 글 참조.
by 서울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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