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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정보

한국 재즈 2

저번엔 고인이 되신 재즈 뮤지션들을 다뤄 보았습니다.

오늘은 현재 활동중이신 원로 재즈 뮤지션들을 다루어볼까 합니다.

앞서서 포스팅이 늦어진 점. 죄송합니다.

라틴 타악기의 거장 "류복성" 선생님.

재즈 피아노의 전설 "신관웅" 선생님.

재즈의 이론가, 작곡가, 교육자, 프로듀서 "이판근" 선생님.

클라리넷 집념의 거장 "이동기" 선생님

그들과 함께였던 가장 오래 된 재즈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이태원의 "올 댓 째즈"

그리고 그들이 만든 재즈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

 

 

 

                                                                           라틴 타악기의 거장 "류복성" 선생님.

언제나 군복 바지를 입고 무대에 오르시는 류복성 선생님으로도 유명하다.

"왜 항상 군복만 입고 다니세요?"
"난 아직 전쟁 중이야... 음악하고"

올해로 재즈인생 56주년을 맞은 드럼 연주자.

그리고 한국에선 불모의 음악이었던 라틴재즈를 독자적으로 개척해온 인물.

그는 1970~80년대 인기 드라마였던 [수사반장]의 타이틀 봉고 연주로도 잘 알려져있다.

하루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

중학교 2학년 때 집을 가출했던 류복성은 19세가 되었을 때 미8군 쇼단 사무실에서 밴드 보이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게 1959년, 그저 라디오 미군방송(AFKN)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좋아서 무작정 악기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 전전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밤마다 혼자 드럼을 연습했다.

하지만 당시 그가 두드리던 드럼이라는 것은 사과 궤짝에 탁구 채를 달아서 만든 그야말로 조악한 모조세트였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다.

평소 성실히 연습하던 그를 눈여겨보던 쇼단의 단장이 밴드의 드러머로 그를 스카우트 하게 된 것이다.

"연습 벌레라는 얘기 들었다. 우리 밴드와 같이 연주해 보자"

뜻밖의 기회였지만 사과 궤짝 드럼세트밖에 없었던 그는 단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우선 한 달 치 월급을 가불받아 겨우 조악한 국산 드럼세트를 마련하게 된다.

그것이 류복성이 난생처음 마련한 악기였다.

그러나 연습 첫날 쇼단의 리더는 류복성이 암기하고 있는 악보가 많지 않음을 눈치채고는 짜증을 내다가 연습을 중단한 채 나가버렸다.

악보가 귀했던 시절이라 연습할 수 있는 곡에 한계가 있었던 신인 드러머에게는 가혹한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연습실에 도착한 류복성은 당대 최고의 드러머 박철이 연습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해고를 직감했다.

이윽고 단장이 류복성에게 말한다.

"미안하지만 자넨 해고네. 첫 월급 가불한 거는 돌려달란 말 안할테니, 그걸로 산 드럼가지고 연습 많이해서 훌륭한 연주자가 돼라구."

류복성의 두뺨에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 눈물은 서러움의 눈물이 아니였다.

드디어 자신만의 드럼세트가 생겼다는 기쁨의 눈물이었고,

자신의 노력을 알아주고 보듬어준 쇼단 단장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다고 류복성은 회상한다.

그로부터 1년 뒤 류복성은 '전국 드럼 경연 대회'를 개최하고 있는 [크라운 장]에 들르게 된다.

비어홀 [크라운 장]은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뒤편에 위치한 대규모 맥주 홀이었다.

드럼 경연 대회는 무대 위에 드럼 두 세트를 놓고 두 명의 드러머가 번갈아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요즘으로 치면 댄스 배틀 성격의 대회였고 별다른 오락 거리가 없던 그 시절에는 꽤나 인기 있는 볼거리였다고 한다.

참가자는 당시 대한민국 5대 드러머라 불리던 최준석, 박철, 양철, 양인환, 조상국을 비롯하여 내로라하는 드러머들이 모두 참가하였다.

그중 최준석은 류복성이 처음 가출하여 밴드 보이로 처음 취직한 쇼단의 단장으로 류복성에게는 첫 사부가 되는 분이었다.

본인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참가할 깜냥이 안된다고 생각했던 류복성이 그곳에 간 이유는 오로지 구경이 목적이었다.

그때 류복성은 상상도 못한 제안을 받게 된다.

대회의 연출자로부터 대회참가를 권유받은 것이다.

연출자는 류복성과 그의 사부 최준석이 한 무대에 오르게 되면 괜찮은 그림이 나오리라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등 떠밀려 경연 무대에 오르게 된 류복성. 사부는 "연습 좀 많이 했냐"며 기꺼이 첫수를 제자에게 양보했다.

헌데 그 첫수의 양보가 제자에게는 큰 기회가 되었다.

평소 최준석의 드럼 스킬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며 부단한 연습을 해왔던 류복성은 사부의 대표적인 스킬을 먼저 연주하며 치고 나갔다.

자신이 연주할 것을 제자에게 빼앗긴 최준석은 차마 같은 연주를 하지는 못하고 대한민국 5대 드러머라는 명성에 걸맞지 못한 연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신예 드러머 류복성의 연주가 빛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관객의 박수를 한몸에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오던 류복성에게 한 경상도 사내가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니 모꼬? 어데서 이런 괴물이 나타났노? 니 내하고 우리 밴드음악 해볼 생각 없나?" 당대 최고의 색소폰 주자 이봉조의 러브 콜이었다.

"난 부자 안 부러워, 어떤 놈도 부럽지 않아... 재즈 뮤지션이니까"

원숭이처럼 생긴 사람이다.

생김새만을 놓고 말하는 게 아니다.

쭈그려 앉아 양손으로 동그란 북을 두드리는 모습이나 뾰족이 고개를 치켜들고 포효하는 장면에선 정말 영락없다.

그는 장장 55년 동안 블루스와 재즈에 파묻혀 살아온 사람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왔으면서도 그의 삶이 아직까지 미정과 유예 속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우리를 숙연케 만든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예술의 끝이 정의되어 있지 않듯, 그는 언제까지나 재즈를 사랑하는 청춘으로, 영원히 미완의 연주자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까워할 일은 아니다.

재즈의 완성을 쫓는 그와 그의 행보를 쫓는 우리들 사이에 형성된 공감은 그 자체로서 이미 진기한 성취가 되었다. - 남무성(재즈 평론가)

류복성 선생님의 추천 곡은 "혼자 걷는 명동 길"과 "사랑 그리고 쓸쓸함", "류복성의 수사반장"을 추천합니다.

 

 

                                                             재즈 피아노의 전설 "신관웅" 선생님.

미국에 끌려온 아프리카 노예들로부터

시작해서 뉴올리안즈, 시카고, 비밥, 쿨, 프리를 거쳐

록 재즈와 퓨전 재즈로 발전해온 재즈 음악은 그 역사만큼이나 장구한 변화의 세계를 자랑하며.

현재는 서구의 클래식과 동등한 위치까지 격상되었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대중화되지는 못한 편이다.

하지만 일천한 역사에 비해 우리는 괄목할만한 인프라를 구축했는데.

여기에는 야누스란 재즈 클럽의 역할이 있었으며.

몇 몇 개척자의 이름들 중에서 "신관웅" 이라는 피아니스트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충정도의 한 시골에서 자란 신관웅은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치던

풍금의 선율에 감동받아 밤마다 몰래 풍금을 만지기 시작했다.

온갖 장난으로 뛰놀던 친구들을 배제하고 혼자 풍금만을 두들기며.

멜로디를 익힌 이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바이엘 교본>을 선물 받아 연습했다.

그 결과 교과서의 모든 동요를 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되었으며.

6학년 때는 체르니를 배웠고, 중학교 때는 처음 본 피아노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집에 피아노가 없어 매일 학교에서 베이비 피아노만 쳐야 했던 그는.

서울예고 특차 시험에서 그만 낙방을 하고 말았고 그랜드 피아노로 연습한 서울 아이들과 격차를 실감한다.

서울에 올라와 대학 재수생활을 시작한 신관웅은.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한 끝에 밴드 맨 인력시장을 알게 되었고,

미8군에서 일할 기회를 잡았다.

그는 여기서 한 외국 피아니스트의 연주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물 흐르듯 자유로우면서도 예측불허의 화성으로 청중을 압도하는 열정적인 재즈 연주가의 초상을 본 것이다.

온통 재즈에 마음을 뺏긴 그는 가수 "정훈희"의 삼촌인 정근도에게 레슨을 배웠고,

재즈 화성을 공부하는 동시에 귀를 트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미8군의 나이트 클럽에서 연주를 하며 대학을 다녔다.

피아노가 없어 틈만 나면 악보를 보고 외운 "메모리 박사" 신관웅은 어렵게 구한 재즈 음반을

수백번 반복해서 들으며 음을 하나씩 채보 했으며,

원서가 귀하던 시절 재즈 교본을 보면 달려가 밤새도록 베끼는 작업을 했다.

피아노가 전자 악기에 밀리던 시절.

그는 친구 정성조가 만든 밴드 정성조와 메신저스 라는 그룹에서 활동하며,

설자리를 자꾸만 잃어가던 친구들의 이탈을 지켜보아야 했지만,

그만은 한때 우리 나라의 대중음악계를 풍미한 "이봉조", "길옥윤", "김강섭"과 같이 밴드를 하고 사사를 받으며

TBC 전속 악단, 웨어 하우스(Ware House), TBC의 통폐합으로 인한 KBS 전속악단에서 활약했다.

방송국에서 매일 같은 음악과 씨름해야 하는 것이 싫었던 그는 박성연이 운영하던 야누스(janus)라는 클럽에서

색소폰의 "김수열", 베이스의 "이판근" 등과 연주회를 가지며,

현재까지 200회를 넘는 정기 연주회를 가지고있다.

이후 생긴 올 댓 재즈(All That Jazz), 길옥윤이 운영하던 웨어 하우스(Ware House) 등에서

연주하며, 재즈를 술을 위한 배경음악이 아닌, 귀기울여 감상하는 음악으로 재조명 받게 했다.

그의 음악을 다시 한번 내면적으로 탈바꿈하게 만든 계기는 싱가포르에서 열렸던,

<제1회 재즈 페스티벌>이라는 행사였다. 연주 실력만으로는 행사에 참여한 외국인들에게 뒤지지 않았지만,

곡을 나름대로 해석해 팀원 전체가 하나의 스타일로 짜임새 있게 연주하는 팀웍은 우리 음악계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던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재즈 이론서와 재즈 음반을 마음껏 사들고 온 그는.

AFKN의 재즈 프로그램을 녹화해 몇십 번이고, 되풀이 해서 보았으며, 매일 워크맨을 귀에 끼고 다녔다.

그리고 추구하는 음악세계를 정립하기 위해.

드럼의 김희현, 베이스의 함기호, 색소폰의 이정식과 함께

1986년 신관웅 재즈 콰르텟(Quartet)란 밴드를 조직했다.

그는 지금까지 4장의 음반을 발매했다.

하지만 그가 아끼는 재즈곡들을 비롯해 가요들을 재즈풍으로 편곡한 곡들이 수록된 음반들은 래퍼토리 부분에서

그리고 녹음이나 연주력에서 많이 아쉬움을 주는 음반들이다

이제는 TV에까지 재즈 전문 프로그램이 생기고 재즈 페스티발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바빠진 그는 KBS 사직 후,

빅 밴드를 결성했다.

그리고 청담동에 새로 문을 연 야누스,

이대 후문의 버드 랜드,

대학로의 천년동안도 등에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자신의 업소인 문 글로우(Moon Glow)를 운영하며 후배들을 위해 더 넓은 터전을 닦고 있다.

그의 삶은 현재진행형이며, 개척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재즈의 이론가, 작곡가, 교육자, 프로듀서 "이판근" 선생님

대한민국의 재즈사를 이야기하는 자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거인이 하나 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활동했던 몇 몇 전설적 연주자들을 뒤로 한 채,

그는 꿋꿋이 제 자리에서 무수히 많은 음악인들을 길러냈다.

작곡가, 이론가, 교육자, 그리고 프로듀서인 이판근(1934~).

한국 전쟁 직후, 마산상고와 서울상대에 재학 했던 시절,

독학으로 재즈를 익힌 이판근은 미8군 무대를 통해 연주 경험을 쌓았고,

1950년대 말부터 많은 동료와 후배들을 규합해 한국 재즈의 여명기를 열었다.

색소폰 연주자로 출발했던 이판근은 베트남 전쟁으로 국내 미8군 무대가 급감하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클럽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던 시절.

베이스로 악기를 바꾸었다.

1960년대. 팝 음악에 밀려 재즈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고,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외국으로 떠나거나 방송국을 기웃거렸다.

사회적으로 한국 재즈의 암흑기라 일컬어지던 1970년대.

그 명맥을 지켜낸 것이 바로 이판근이다.

오늘날 중진으로 손꼽히는 절대다수의 연주자들이 마음의 고향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또한 그다.

한국 재즈의 본격적인 첫 앨범으로 기록된 (재즈로 들어본 우리 민요,가요,팝송)<1978>에서 편곡을 담담했고,

(박성연과 재즈 at the janus Vol.1)<1985>에 실린 곡 의 대부분도 그의 연주와 편곡으로 완성됐다.

1985년, 이판근은 연주를 접고, 곡 작업과 후배 양성에 몰두하기로 결심했다.

이판근이 없었다면, 오늘날 강태환, 최선배, 신관웅, 정성조 등의 명인들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정원영, 김광민, 한충완, 이정식, 윤희정, 임인건, 전성식, 유성희, 조윤성 등도 그를 통해 재즈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의 후배양성이 재즈계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 "봄여름가을겨울"의 전태관과 김종진.

포크가수 "박학기", 영화음악가 "조성우"를 비롯해 심수봉, 인순이.

윤수일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진 가수들까지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지금까지 그를 사사한 이들의 수는 약 3,000여명에 이른다.

이판근의 삶은 1950년대부터 이어온 한국 재즈의 맥과 호흡을 같이한다.

특히 그는 20여 년 전부터 국악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병행하며, 한국형 재즈의 정착에 헌신해왔다.

다만 그가 만든 무수히 많은 곡들이 아직 미발표로 남아 있던 탓에 세상은 그의 묵직한 존재감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지난 2010년, 소장파 연주자들로 구성된 "이판근 프로젝트"가 [A Rhapsody in Cold Age] 를 발표하며,

이판근의 곡들을 현대적인 어법으로 재구성했다.

이 앨범은 제 8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재즈 음반으로 선정 되기도 했다.

 

                                                                    클라리넷 집념의 거장 "이동기" 선생님

세상의 이목을 끌지 않는 분야에서 묵묵히 수십 년을 종사해 온 사람들을 향하여 "집념의 장인"으로 대접하고,

그 분야를 "지켜온 분"이라고 종종 말한다.

대단히 공리적인 이런 수사학은 전혀 틀린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좀 더 느슨하게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클라리넷 연주자 이동기.

그가 좋아할지 싫어할지 모르겠으나 이 황혼의 연주자가 "한국 재즈를 지켜왔다"기 보다는

클라리넷으로 재즈를 연주하는 한 삶을 소박하게 즐겨왔다고 생각하고 싶다.

사실 한국에서 재즈는 반드시 지켜야 할 전통문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금새 날아가 버릴 휘발성 높은 유행가도 아닌,

그저 그 즉흥과 리듬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수십 년을 어루만지고 보듬고 사랑해온 장르인 것이다.

이제는 젊은 음악가들이 대거 출현하여 재즈의 현대성까지 실험하고 있지만.

사실 이동기와 그 연배의 1세대 재즈맨들에게 있어 재즈는 스윙이었고. 사랑이었고. 열정이었던 것이다.

2002년 10월,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동기는

"제가 어렸을땐 스윙이 한창 유행이었지요. 베니 굿맨, 카운트 베이시, 글렌밀러..

그 분들 음악을 판으로 들으면서 재즈에 빠져들었어요. 재즈 학교 같은 건 꿈도 못 꿨지요.

그땐 클라리넷이 가장 잘 나가던 악기였는데.."라고 회상한다.

그래서 그는 색소폰이나 트럼펫보다 음폭이 넓고, 표현력이 풍부한, 바로 베니 굿맨이 세계화시킨 클라리넷을 불었던 것이다.

그 다음은 예정된 순수.

그러니까 1세대 재즈맨들이 그러하듯이 이동기는 60년대의 미8군 악단 무대에 섰고,

70년대 대중음악의 구석에서 연주를 했다.

"내 이름은 소녀"로 큰 인기를 얻었던 "조애희"와 결혼해 화제를 낳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70년대 있어 재즈맨은 외로운 길을 걷디 않을 수 없었다.

"정훈희"가 히트시킨 "그 사람 바보야" 등을 작곡하기도 했으나,

대체로는 시내 곳곳의 나이트 클럽에서 스탠다드 팝을 연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30대의 왕성했던 시절을 나이트클럽으로 전전하면서 이동기는 음악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었다.

단순한 레퍼토리를 도돌이표로 불어대야 하는 삼십대를 넘기고.

나이 마흔을 넘어서도 나이트클럽의 악사로 남게 될 듯한 위기감 때문에 2년여를 두문불출하기도 했다.

그때, 1세대 동료의 전화가 걸려왔다. 박성연, 이판근, 강대관 등이

그를 한국 재즈의 산실 [야누스]로 불러냈고, 이동기는 4년 여에 걸쳐 쉼없는 연습 끝에.

그들과 함께 저 60년대의 넘실거리는 스윙을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동기의 클라리넷은 섬세하고 우아하다.

다른 멤버들이 격정의 한 고비를 넘길 때도 이동기는 가만히 리드 끝을 불어 전체적인 온도를 차분하게 조율한다.

지금 이동기는 홍대 앞 무대에서 드럼의 최세진, 피아노의 신관웅과 더불어 황혼의 재즈맨으로 여전한 현역 무대를 갖고있다.

그러니까 이동기는 어떤 사명감으로 재즈를 지켜온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그의 몸속으로 들어와 버린 재즈와 더불어 동고동락하면서, 쓰라린 좌절과 작렬하는 연주의 한 순간을 탐미하면서,

그렇게 한 생애를 재즈처럼 살아 온 것이다.              -정윤수(문화평론가)- 발췌.

 

오늘은 아직까지 현역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신 열정의 원로 재즈 뮤지션들을 조금 다뤄봤습니다.

여기까지 읽어 보셨다면.

한가지.

바로 재즈 뮤지션들과 함께 숨쉬며, 수 많은 재즈 뮤지션들을 배출해 낸 "재즈 바"들이 쉴틈없이 등장하는 것을 느끼셨을겁니다.

바로 이태원에 국내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재즈 바 "올 댓 째즈"

1976년 오픈해서 당대 최고의 재즈 뮤지션과 항상 함께 좋은 연주를 들려주는 곳 입니다.

언제 한번 이태원 가시면 꼭 한번 들려보셨으면 합니다.

 

 

 

 

 

위치는 이태원역 2번 출구로 나와서 바로 좌측 코너로 꺾고,

직진하다보면 이태원갈비가 나오는데 거기 우측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입장료는 5000원이며, 재즈를 잘 모르시는 분들이라도 한번 가보시면,

매혹적인 재즈의 선율에 취하실 듯 합니다.

전화번호: 02-795-5701

주소: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112-4

우리나라 재즈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 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빼 놓으면 섭섭한 "재즈 바"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서초동에 재즈클럽 야누스 입니다.

국내 재즈의 역사를 살펴보면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죠.

국내 재즈계의 대모라고 할 수있는 재즈 1세대 "박성연" 선생님이 운영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신관웅, 이정식, 웅산 등 내로라 하는 분들이 바로 야누스 출신 입니다.

 

 

 

 

위치는 교대역 1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우회전 하시면

바로 앞 작은 사거리에서 좌측을 보면 지하에 자리한 야누스 재즈클럽이 보이실 겁니다,

전화번호: 02-546-9774

주소: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1670-6 (B1)

자 그러면 오늘 한국 재즈 의 마지막 포스팅이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릴 것은.

바로 오늘 소개 해드렸던 원로 뮤지션들이 모여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아시는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바로 2010년 12월 16일에 개봉 했었던 브라보 재즈 라이프(BRAVO, JAZZ, LIFE.) 입니다!

국내에서 개봉도 했지만, 많은 사랑은 받지 못했던 것 같네요.

정말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나 전공자 분들은 꼭 보셨으면 하는 영화 입니다.

아래는 브라보 재즈 라이프 예고 영상입니다. 함께 감상하시죠!

 

 

 

by 서울상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