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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정보

60년대, 신중현과 ADD4(에드포) 그리고 엽전들.

50년대 후반. 국내의 음악시장은 그 당시의 사회적 영향을 받아 굉장히 암울했던 시절이였다.

그렇게 힘든 시절인 만큼. 음악은 곧 국민들의 희망이며. 안식처였다.

국민들의 "희노애락 = 음악" 이라는 표현이 적절 할 것 같다.

뭐. 그 이후에도 우리나라는 안 힘들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지만...

대부분의 가수들은 미군부대에서 활동을 하며.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으며.

흔히들 50년대 후반 "가수"라 하면은 진짜 기막히게 노래하는 사람들을 가르켜 "가수"라는 칭호와 개념적인 의미를 두었던 시절이였다.

당대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자랑하던  티김(58년 데뷔) - 이미자(59년 데뷔) - 하춘화(61년데뷔) 로 이어지는 "여성 보컬"의 전성기는 가히 대단했다.

하지만 그 때 우리나라의 상황으로 보아 한국 가요계는 "일본식 트로트"가 주를 이뤘다.

그 찬란했던 전성기 가운데 꾸물꾸물 ROCK 이라는 음악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새로운 서구 장르를 선보인 "작은 거인" 중현이 있었다.

그 당시 사회적 키워드는 4.19혁명, 5.16쿠데타, 경제개발 이였다.

정치적, 사회적 변혁을 통해 마련되기 시작한 국가 재건이 최대 화두였던 그 시절.

미군의 여흥을 위해. 국내에 유입 된 서구의 대중문화는 사회 각 분야의 일대 혁신을 몰고왔다.

 

                                                                             1963년 데뷔 한 ADD4(에드포) 가운데 신중현의 모습

 

신중현의 정확한 데뷔는 1955년 미8군의 "스프링 버라이어티 쇼 (Spring variety show)" 무대를 통하여 데뷔하였다.

여기에서 그 는 미군들의 기호에 맞춰 재즈, 스탠다드 팝, 록 음악을 연주하며 5년간 미8군의 톱스타로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63년 기타.베이스.드럼.보컬로 구성된 ADD4(에드포)를 결성하였고,

64년 (빗속의 여인)과 (커피 한잔) 등 새롭고 전위적인 사운드의 노래들이 실린 데뷔앨범 <에드 포>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신중현은 그 "에드포"에서의 활동과 더불어 "조커스","덩키스","퀘션스", 등의 그룹을 조직해 활동하면서 "그룹 사운드"를 한국 땅에 정착 시키며

ROCK이라는 장르에 한국적인 느낌을 입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나갔다.

또한. 신중현은 작곡가로써도 탁월한 능력을 선보이며, 68년 펄시스터즈의 "님아", "떠나야 할 그 사람",

69년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 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등 많은 히트곡을 남기며.

장현, 박인수, 김정미 이른 바 신중현 사단이라는 것을 형성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신중현 라인(?)이 되겠지.

아무쪼록 그 가 곧 중심이되어 한국 가요계를 풍미했다.

60년 말에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렸던 "싸이키델릭 록"의 스타일의 곡도 선보였다.

대표곡으로는 "봄비", "꽃잎" 등이 있다.

아! 그리고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64년 에드포와 양대산맥, 쌍두마차를 이루던 밴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윤항기 "키 보이스(Key boys)" 다.

마치 해외음악으로 따지면 70년대 레드제플린과 딥퍼플을 보는 듯 한 그런 느낌의 상황이라 보면 적절 할 것 같다.

"키보이스"의 대한 포스팅은 다음 포스팅에서 할 생각이다.

지금은 "신중현"의 대한 글 이니까..

이야기가 좀 샜지만. 시간이 좀 흐르고 73년. 신중현 자신이 기타와 보컬을 맡고.

이남이(베이스), 권용남(드럼)과 함께 3인조 밴드 "신중현과 엽전들"을 만든다.

신중현과 엽전들로 4장의 앨범을 발표 하면서 한국적 ROCK 사운드가 담기 대표작들을 많이 남겼다.

이 대표작들 중에 "미인" 이 담긴 1집은 한국 음악 역사상 명반으로 꼽힌다.

 

 

 

이 후. 한국 음악계 역사상 큰 위기가 찾아온다.

바로 74년 대마초 파동이다.

유신정권하에서 대중음악가들이 대마초 연예인으로 낙인 찍혀 구속되고. 많은 노래들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어버렸다. 이 사건에 신중현도 연류되어 징역 4개월에 그 의 곡 가운데 100 여곡이 금지곡으로 묶여버렸다.

그 당시 금지 되었던 뮤지션들의 곡들은 무려 13년이 지난 87년 비로소 풀리게 되었다.

하지만 신중현은 멈추지 않았다. 그 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86년 라이브 클럽 "록 월드(Rock world)"를 만들었고, 음악가들에게 연주 공간을 제공했다.

그리고 개인 스튜디오 우드스탁(Woodstock) ((지금의 신중현MVD))을 만들어 80년대 중반 이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90년에 전기기타의 산조라 불리는 무위자연(1994), 김삿갓(1997) 등을 발표하였다.

2008년에는 한국대중음악상과 수 많은 공로상을 받았고. 2009년 12월에는 아시아 대중음악가로는 최초로 세계적 기타 제조회사 "펜더"(Fender)에서

맞춤기타를 헌정 받았다.

록 밴드 "시나위"의 기타리스트이자 리더 인 큰 형"신대철"과 "한국전자음악단"의 둘째 "신윤철", "신석철"도 대를 이어 ROCK 음악계에서 활동 하고있다.

이건 여담이지만. 기자와 신중현의 인터뷰 중. 기자가 아들 세 분중에 음악을 누가 제일 잘하냐? 라는 질문을 하자.

신중현은 막내 "신석철"을 꼽았다고..그래서 형들 많이 자극 받았다는 뭐 그런 에피소드가 있다.

 

 

2009년 12월 펜더 기타를 헌정 받는 신중현의 모습.

 

첫 나의 블로그 포스팅에 신중현 선생님을 포스팅 한다는게 무척이나 영광스럽다. 잘 설명하고 잘 쓰고 싶었지만.

뭐..잘 썼는지.뭐가 뭔지 모르겠다.

정말 대한민국이 힘든 시절. ROCK 음악의 대한 열정으로 지금 현재의 ROCK 음악을 연구하고 연주하는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시고. 항상 존경의 대상이 되시는 신중현 선생님. 항상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사세요.

 

최근 2012년 9월 28일 미국 음반사

"라이트 인 디 애틱"(Light in the attic)의 10주년 기념 공연에

초청 되어 LA에서 공연을 하셨네요.

그 공연 포스터 입니다.

 

 

 

 

 

 

by 서울상회

                                                                        

 

 

 

 

 

 

 

 

 

 

 

 

1955년 미8군의 '스프링 버라이어티 쇼(Spring variety show)' 무대를 통하여 데뷔하였다
[출처] 신중현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