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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정보

60년대, ADD4(에드포)냐. Key boys(키보이스) 냐.

오늘은 그 전 포스팅에도 소개 해드렸지만 60년대 그룹 사운드를

국내에 정착시킨 신중현의 ADD4(에드포)와 더불어 양대산맥으로 불리우는

윤항기의 키보이스(Key boys)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아직까지도 60년대의 록그룹의 효시는 에드포냐, 키보이스냐 라는 논쟁이 많지만,

개인적으론 두 팀다 정말 최고의 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의거,

그리고 5.16군사혁명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60년대는 보릿고개 시절로 젊은이들은

현대에 동화되지도 못하고 전통에 대한 미련도 없는 우울한 세대였습니다.

노란샤쓰의 사나이로 촉발된 신가요의 붐이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의 대히트로 다시 트로트로 급선회하고 있던 시기,

영국에서는 리버풀 출신의 비틀스가 기타 3대와 드럼만으로‘I Wanna Hold Your Hand'을 외쳐대고

롤링스톤스가 폭발적이고 괴상한 불협화음으로 세계젊은이들의 심장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미 8군무대를 중심으로 비치보이스와 비틀스의 노래,연주를 주요 레퍼토리로 삼던 이미테이션 그룹!

바로 키 보이스(Key boys) 입니다.

 

키 보이스(Key boys)

보컬: 차중락

퍼스트 기타: 김홍탁

리듬 기타: 옥성빈

베이스 기타: 차도균

드럼: 윤항기

 

키 보이스의 시작은 드럼의 프론트 맨인 "윤항기"로 부터 시작된다.

해병대 군악대 복무 시절부터 그룹 사운드 결성을 꿈꾸던 윤항기는 군을 제대한 1963년 초

드디어 유희백, 옥성빈, 차도균 등을 미8군 무대에서 만나면서 그 꿈의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유희백이 갑작스럽게 떠나면서 공백이 생긴 기타 포지션을 "한국 락 기타의 귀신"이라 불리는 "김홍탁"이 메우게 되고

차도균의 사촌동생인 차중락이 가세함으로서 키보이스의 전신 밴드인 "더 키즈"가 출항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팀명을 확실한 열쇠꾸러미, 키 보이스(Key boys)로 바꾼다.

 

 

1964년 7월 키보이스의 1집은 타이틀곡 "그녀 입술은 달콤해"를 비롯해 "사랑이 싹틀 때"와 "말광량이 아가씨" 등

김영광 작품인 국내 창작곡들과 키보이스의 미8군 무대에서의 주요 레퍼토리들이 실려있다.

사운드의 주요 특징은 트위스트와 서핀 사운드이다.

지금으로보면 댄스를 위한 락 정도로 볼 수있다.

키보이스는 락앤키(Rock & Key)라는 팀명으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는데

그래서 같은 시대에 두 개의 이름으로 앨범이 발매되는 진귀한 풍경도 연출되었다.

밴드의 멤버인 "차중락"은 앨비스 프레슬리 흉내를 잘 내었고,

"윤항기"는 미국의 맹인 가수 레이 찰스 흉내를 잘 내는 등

인기 몰이의 비법에는 음악 외적인 요소들도 많이 작용한다.

아쉬운 점은 1기 키보이스 멤버의 창작곡이 없다는 것이다.

신중현이 이끌던 에드포가 첫 앨범을 자작곡들로만 채워서 앨범을 발매한 것과 비교하면

이 부분에서 키보이스가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다.

 

 

1967년 7월 2집 "정든배는 떠난다"

전체적인 사운드는 60년대 유행했던 트위스트, 록앤롤에 바탕을 두고있다.

앨범 자켓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60년대 중후반 한강변의 모습이다.

윤항기의 코믹한 여성용 원피스 수영복이 일품이다.

번안곡이 아닌 국내산 자작곡 "정든 배는 떠난다"가 수록되어 있고,

키보이스는 67년 앨범 발표 후

"차중락"과 "차도균"이 그룹을 떠나고, 그 자리에 장영 박명수가 메워진다.

당시 지미 헨드릭스의 비트 강한 음악에 심취했던 "김홍탁" 역시 키보이스의 스탠다드한 음악노선에

심한 갈등을 느끼다가 결국 탈퇴한 후, 한웅이 창단한 락 그룹 "He5', "He6"의 팀 리더로 추대되고,

그 자리에 조영조가 영입된다. 그리고 리더인 윤항기

69년 전국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 최우수상을 수상한 후

"키 브라더스"를 결성하면서 탈퇴한다.

67년 부터 첫번째 키보이스는 흩어지기 시작한다.

 

 

67년 부터 키보이스의 초기 멤버들은 조금씩

떠나고 후기 멤버들이 꾸려 나가면서

70년 부터 2기 키보이스로 빅 히트곡들을 양산한다.

후기 키보이스의 주역들은 조영조, 박명수, 장영 등이다.

다행히도 원조 멤버인 옥성빈 만은 남아서 함께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남아있던 옥성빈 마저 결국 69년 9월 후기 멤버들과의 갈등을 견디다 못해

시민회관 무대를 마지막으로 탈퇴를 선언한다.

하지만 "키보이스"란 이름을 그대로 쓰면 안된다는 1기 멤버들과의 갈등이 대단히 심했다고한다.

논란 끝에 이미 획득한 키보이스란 상업적 논리에 따라 그 맥을 잇게 된 2기 키보이스!

2기 키보이스는 총 7인조로 구성 된다.

조영조, 오정소, 백승진, 이광일, 조기상, 장영, 박명수

 

남아있던 윤항기와 옥성빈이 69년 모두 떠나고

새로운 2기 키보이스로 1970년 발매 된 첫 앨범.

이 앨범에는 키보이스의 명곡이라 불리는 "바닷가의 추억"이 수록되어 있다.

후기 키보이스의 음악은 트로트적인 요소가 강한 락을 들려주었다.

우리가 알고있는 키보이스의 히트곡들은 사실 대부분 후기 멤버의 작품이다.

 

 

그리고 드디어 나왔다.

"제 2회 전국 보컬 그룹 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인기상 수상을 기념하여 제작한 앨범으로

불후의 명곡인 "해변으로 가요"가 수록되어 있는 전설의 앨범.

아직도 매년 여름이면 "바닷가의 추억" "해변으로 가요"

이 때를 기억하는 분들에겐 청춘의 감성을 깨우곤 한다.

앨범 자켓에서의 스카프 패션. 역시 남다르다.

 

 

71년 트로트 락의 교과서라 할 만한 앨범이다.

"님 떠나 갈 시간"에서 구성진 기타 웍과 멜로디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희야"는 하드락과 트로트를 기차게 믹싱한 곡이다.

"예전엔 깊은 정인데", "옛정", "이별의 순간"등 앨범을 듣다보면

거의 모든 곡이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노래라는 친근하면서도 아득한 느낌이 든다.

이 음반의 대부분의 곡들은 "김영광"의 작품들이지만, "오! 당신"은 기타리스트인 조영조의 자작곡이다.

< 키 보이스의 수상 경력>

* (69년) 제 1회 플레이보이배 쟁탈 전국 보컬그룹 경연대회 최우수상

* (69년) 제 1회 개인연주상 (리드기타 조영조)

* 제 2회(70년) 최고인기상

* 제 3회 한밭가요대상에서 보컬그룹상

* 제 1회(70년) 문화공보부장관배 쟁탈 전국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

* 제 1회(70년) 개인연주상 (리드기타 조영조)

 

 

75년 4월 "Key Boys GOLD"라는 이름으로 발매된 후기 키보이스의 베스트 음반.

자 그럼 여기서 궁금한 점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2기 키보이스 멤버들이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시점.

원년 1기 멤버들은 과연 무엇을 했을까?

초기 키보이스 멤버들은 모두 4장의 음반을 남기고 1967년 해체 이 후,

솔로로, 그룹으로 각기 가요사에 큰 획을 긋는다.

밴드 사운드가 대중들에게 힘을 잃고 시들시들 해져가던 70년대.

윤항기는 1971년 "키브라더스"를 결성하여 국내 가요계에 컴백했고

키브라더스 해체 후에도 솔로로 활동하며 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리드싱어 "차중락"은 66년 "그 밤과 같이" 앨범을 통해 발표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이후

솔로로 전향하여 "사랑의 종말", "철없는 아내", "그대는 가고" 등을 발표하며 67년 최초 가수왕에 등극한다.

"차도균" 역시 67년 "Guys & Dolls"에 잠시 몸 담았다가 68년 "꽃잎 새긴 사랑"을 발표하며 다시

솔로로 전향했다.

스탠다드 팝보다 헤비메탈 사운드를 추구하던 "김홍탁" 역시 68년 "He5", "He6"등을 거치면서

당대 최고 인기 그룹으로 부상하며 이후 전개되는 그룹사운드의 황금기를 주도한다.

새로운 멤버 2기 키보이스는 굳건히 명맥을 이어서 이후로도 제 3기, 제 4기 등으로 이어지며

키보이스 계보를 계승한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포크의 물결속에 가려져 3,4기의 키보이스는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70년 후반에서 80년 중반까지 언더그라운드와 대학가요제를 통해 다양한 모습의 그룹사운드 음악이

대중들의 인기를 얻으며 다시 한번 그 영광을 재연하게 된다.

이 포스팅을 시작하기 전 앞에서도 언급 했듯이

한국 록음악의 효시가 윤항기의 키보이스냐 신중현의 에드포냐 하는 논쟁은

여전하지만 키보이스가 개척하고 들려준 음악은 비록 음악적 한계는 있다 하더라도

처음 시도된 트로트와 록의 접목, 이들 이후 수많은 대중적 록그룹들의 개체번식은

키보이스가 부정할 수 없는 한국 록그룹의 개척자임을 증명 해주고 있다.

그럼 오늘의 60년대 포스팅을 마지막으로 키보이스의 불후의 명곡 "해변으로 가요" 와 "바닷가의 추억"을

한번 감상 해보시는건 어떨까요?

그럼 이상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60년대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다음 포스팅부턴 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변화와 흐름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by 서울상회